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과 수도 상실 === [[파일:external/files.umwblogs.org/second-conquest-e1323658337476.jpg]]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은 [[마누일 대제]]를 제외하면 십자군 세력들을 믿지 않고 그저 여러 야만인들 중 하나로 취급하는 외교 정책을 고수했으며 십자군도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동로마 제국을 음험한 권모술수가들이라 생각하였다. 십자군이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병크와 만행을 생각하면 이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순 없지만, 실리를 따져볼 때 이런 정책은 동로마 제국에게도 별로 득될 게 없었다.[* 동로마 제국에 대한 십자군의 이러한 인식은 어휘 차원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Byzantine'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ekw000024356&q=Byzantine|'권모술수를 쓴; 복잡한, 미로처럼 뒤얽힌, 헝클어진']]이라는 형용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속이 복잡하게 배배 꼬여 있는, 음험한 능구렁이 같은 놈들이라고 본 것.] 그나마 [[마누일 대제]]의 노력으로 동서방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의 라틴인 대학살로 모든게 물거품이 되고만다. 상호 불신으로 인해 12세기 동서방의 관계는 최악으로 냉각되었고[* 그나마 안드로니코스 1세를 족치고 일어선 앙겔로스 왕조의 두 황제들이 외교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마누일 1세 시기의 외교 수준을 회복하기도 전에 4차 십자군이 터지고 만다.], 제2차 십자군 이후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력이 통합되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십자군 전쟁 또한 희망적인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하였다. 제4차 십자군(1202~1204)이 자금의 부족으로 곤경에 처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 십자군을 활용하여, 베네치아의 라이벌격인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매우 나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십자군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렉시오스 1세]] 항목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편 제국은 지방 통제력이 붕괴하면서 각 지방에서 지방 귀족들이 실권을 장악하여 지방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콤니노스 시대 콘스탄티노플 및 수도의 황실 일가로의 중앙집중화가 가속화되었던 탓에 그 반작용으로 각 지방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잠재되어 있었는데, 마누일 1세 사후 혼란상이 펼쳐지면서 이렇게 잠재되어 있던 반발이 크게 대두되었다. 유명한 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형인 미하일 호니아티스는 정확히 이 시기였던 1180년에서 1205년까지 오랫동안 아테네 대주교를 지내고 있었는데, 그리스와 에게 해 각 지역과 그 특산물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모두 이미 콘스탄티노플로 흘러들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더 부족하냐면서 콘스탄티노플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고 한다. 나아가, 이 모두를 '''우리(us, our)'''로 함께 묶어서 지칭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you라고 타자화하며 [[서울 공화국|콘스탄티노플 vs 나머지 지방의 대립구도]]'''가 표출되고 있는 점이 보인다.[* Judith Herrin의 'Margins and Metropolis: Authority Across the Byzantine Empire' 중 24p, 'What do '''you''' lack? Not the wheat-bearing plains of Macedonia, Thrace and Thessaly, which are farmed by '''us'''; nor the wine of Ptelion, Chios and Rhodes, pressed by '''us'''; nor the fine garments woven by '''our''' Theban and Corinthian fingers, nor all '''our''' wealth, which flows, as many rivers flow into one sea, to the Queen City.'] 이런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알렉시오스 3세는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문제를 해결해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의 폐위로 위기에 몰린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자신을 황제로 옹립해주는 대신 십자군에게 보수로 많은 지원을 약속했다. 십자군은 이 제안에 솔깃했고, [[제4차 십자군 원정#s-4.3|알렉시오스 4세의 제위를 되찾아주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외세를 끌여들여 황제를 교체한 까닭에 민심도 좋지 못하여 반십자군 선동이 확산되자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에서는 민심을 잃은 알렉시오스 4세가 쫓겨나고 알렉시오스 5세로 교체되었지만, [[제4차 십자군 원정#s-4.5|금각만 지역의 성벽에 생긴 틈으로 십자군이 침입하였다.]] 원래 육상부의 3중 성벽에 비하면 해안의 성벽은 좀 낮았으며, 베네치아인들이 그 곳을 집중 공략했다. 게다가 정예병들은 모두 반대편으로 도망간 상황이었다. 난장판은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금각만 지역의 성벽에서도 내통자로 인해 성문이 열린 것이다! 결국 위엄 돋는 3중 성벽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이로인해 난공불락이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처구니 없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사흘 동안 마음껏 약탈하면서 그 광기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모든 곳이 털렸다. 정교회의 총본산 하기아 소피아부터 제국의 정궁 블라헤르네 궁전, 역대 황제들의 묘소인 성 사도 성당까지. 57년 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인들의 손에서 탈환하나 라틴인들의 지배로 인해 입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손실은 끝내 복원하지 못했다. 제국이 오스만에게 멸망하는 그 날까지.] 약탈이 끝난 후 십자군은 제국이 멸망한 자리에 로마니아 제국, 통칭 [[라틴 제국]](1204 ~ 1261)을 세웠으며 에우보이아와 크레타 등 일부 지역은 십자군을 지원한 베네치아가 먹었다. 베네치아는 가장 큰 경제적 라이벌이었던 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방과의 교역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며 '아드리아 해의 여왕'으로 떠올랐다. 이로써 고대 로마에서부터 한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져내려오던 동로마 제국의 법통은 여기서 끊어졌다. 한편, 제국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십자군이 점령하지 않은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각지로 도주하여 [[니케아 제국]]과 [[트라페준타 제국]], 에피로스 공국 등의 망명 국가를 세워 제국을 짓밟은 라틴인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